원주여행 거돈사지 고려승려 원공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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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는 다른 듯 같을 나의 이야기

원주여행 거돈사지 고려승려 원공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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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많은 역사적인 흔적들을 갖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기원전 3세기 이후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부족국가 성립을 촉진시켰던 지역 원주.삼한시대엔 마한에 한 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져 있었던 삼국시대를 살펴봐도 그렇다.삼국 각국이 그리도 차지하려고 애쓰던 곳이 원주 아니겠는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궁예가 처음 의탁을 해서 세를 키울 수 있었다고 하는 양길이란 사람의 거점도 원주였다니.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원주지역의 절터가 100여개가 넘는다는데,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많은 사적,유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단 생각도 든다.

 

오늘 알아볼 곳은 원주 부론면 정산리 189번지 내의 사적 168호 거돈사지였다. 역시 법천사지가 있는 부론면 법천리와 가까이 위치해 있다. 현재 거돈사지의 면적으로 예상하는 곳이 14000평이 넘는 넓이이니 현계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다던 거돈사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돈사는 현재 남아있는 보물750호 3층석탑을 볼 때 신라시대에 중건되었다.

거돈사는 고려초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중기에 이르러서는 천태종에 흡수되었다. 법안종에 대해서 잠시 짚어보면 선과 화엄을 융합하여,안목을 무한으로 넓혀 일체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체득할 것을 강조한 종파라고 한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거돈사지는 1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불탑과 탑을 남북 선위에 배치하고 탑의 남쪽에는 중문을 놓고 다시 법당의 북쪽에는 강당을 배치하는 동시에 이들을 모두 회랑으로 둘러싼  모양을 말한다. 아, 가람이란 말은 그냥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이니 그냥 절을 말하는 것이다.탑의 위치가 사찰 내에서 어떤 곳에 있느냐에 따라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회랑은 사원이나 궁전건축에서 보여지는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말한다.

 

 

현재 거돈사지는 중문터,탑,금당터,강당터,승방터,회랑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금당의 규모가 앞5칸,옆3칸으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2단의 기단으로 3층의 탑신을 쌓아놓은 거돈사지 옛 금당터 앞에 위치한 탑으로 탑의 조성연대는 9세기로 추정된다.

아래층 기단으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 ,맨 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져 있다.

탑의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양식으로 보여진다. 백제의 가람배치에 탑은 통일신라이니 오랜 시간 혼이 남아있고 융성했던 절터임은 분명하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원공국사

 

법화경을 기본으로 완성된 중국 불교학의 하나인 천태학승려로 법호는 지종, 속성은 전주 이씨, 이 분은 승려 영재이셨는가 봅니다. 8세에 홍범삼장이란 인도승의 제자가 되어 "누가 그를 유학이라 하겠는가"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 배움이 뛰어나셨다고 한다. 이 분 역시 이 곳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셨다는 사실. 사료를 살펴보면 그는 당대에서는 최고의 승려 영재요, 유학파였던 것 같다.

 

 

원공국사 승묘탑비

 

보물 78호 당시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는  부론면 정산리 144번지에 위치한 탑비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는데 이는 고려시대 많은 비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중국에 비해서도 전혀 뒤떨어짐이 없다고 한다. 이 탑비에도 역시 지종스님의 생애와 행적, 송덕문이 담겨져 있다.

 

 

원공국사 탑

 

우리나라 많은 유물들이 일제에 의해 반출되었고 그나마 지종스님의 사립탑이라는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은 1948년 다시 돌아온 몇 개 중 하나란다. 물론 그렇게 돌아와서 제 자리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역시나 경복궁으로 옮겨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1025년 고려 현종 때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조형 전체의 비례가 뛰어나고 중후한 멋이 느껴지며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고 하나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확인할 수는 없다.

 

 

 

 


 

슬슬 드는 생각은 요즘같은 지방 분권화 시대에  왜 저런 유물들이 서울이란 도시에 모여져 있어야 하는건지, 물론 행정적,관리적인 측면에서 선택되어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원주라는 지역의 특색있는 시그니쳐가 될 수도 있었을 것들이 하나둘 옮겨갔다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분명 다 모여지면 이 또한 어떤 스토리 라인이 잡혀갈 수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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