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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는 다른 듯 같을 나의 이야기

원주여행 부론면 법천사지/지광국사탑비/당간지주 그리고 지광국사탑

워낙 불교를 숭상했던 왕조가 많았던 나라다 보니 곳곳에 절들도 많은 우리나라,

그 중 원주에도 적지않은 절터,폐사지가 남아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법천사지에 대한 얘기로 지면을 채워보기로 한다.

 

법천사는교종 불교 양대 교단이었던 법상종 계열의 절로, 그 기원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이 곳에 머물며 그 세가 크게 확장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법천사

 

법천사는 "진리가 샘처럼 솟는다"라는 뜻을 가진 법상종 계의 절로 신라 성덕왕 24년에 창건되어 법고사라고도 불렸다. 이후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번성하게 되고 뒤이어 지광국사가 은퇴 후 입적하기 전까지 이 곳에 머물면서 크게 융성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인천 이씨인 인주 이씨, 우리가 알고 있는 이자겸이란 사람도 이 가문의 사람인데 지광국사께서도  당시 최고문벌이라 할 수 있는 인주 이씨,경원이씨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니 역시나 그 때나 지금이나 종교와 정치는 참 끈끈한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해본다. 물론 80이 넘는 나이까지 장수를 하셨으니 나름 바른 생활을 하셨겠다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지금은 부론면 법천리 629번지 일대에 그 절터만 남아있는데 2589년까지 존속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전소되었다.

폐사된 절터에는 민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절의 돌들은 축대가 되거나 담이 되었고 논밭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허균의 "법천사기"에는 그가 지광국사의 탑비를 보고 탁본을 하지 못한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스님과 나눈 얘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다"라며 대화를 나눈 것을 볼 때 당시 절의 크기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학자인 유방선,권람,한명회,강효문,서거정이 시를 읊어서 시문을 남겼다고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조물은 지광국사현묘탑비,부도전지,당간지주 등이 남아있고 일제시대 반출되었던 지광국사탑은 이 곳이 아닌 경복궁에 있다고 한다

 

 

지광국사

 

본관은 원주이며 속성은 원씨,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이며 법상종의 고승이다. 법호는 해린(海麟)

 

 

지광국사탑비

 

 

고려 문종 24년 해린이 이 절에서 입적하자 문종이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앵의 머릿들을 올린 모습,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북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얼굴은 용의 얼굴에 가깝다고 한다. 턱 밑에는 긴 수염이 달려있고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王자를 새겨놓았다. 비문에는 해린이 불교에 입문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을 담고 있다고 한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이라 한다.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쳐놓은 것으로 돌로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다. 절이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의미로 볼 수 있어 솟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한다. 원주 시내에서도 봉산동 당간지주를 확인할 수 있다. 봉산동 당간지주는 신라말 천왕사라는 사찰에 세워진 것이라 설과 신라초기 창건되었던 비마라사터라는 설도 있다. 수천년 한 자리를 지키고 염원을 담았을 생각을 해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구조물이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지광국사 현묘탑

 

고려시대 만들어진 어떤 탑보다도 그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되어지는 탑이라고 한다.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시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1962년 국보 제101호 지정이 되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