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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는 다른 듯 같을 나의 이야기

[원주여행] 원주시 봉산동 당간지주

강원도 유형문화재 49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주시 봉산동 당간지주에 대해 알아보자.

 

절에서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에 깃발을 걸었는데 그걸 당이라 하고 이러한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한다. 그 당간을 양쪽에서 잡아주는 기둥을 오늘 소개하는 당간지주라 하는 것이다.

 

원주시 봉산동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당간지주 옆으로 공영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또한 삼광택지라고 불리는 곳과 멀지 않은데 삼광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런게 있단다.

 

옛날 이곳에 박필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옛날 이 근방에는 집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서울서 큰 부자 한 사람이 오더니 사방 터를 두루 살핀 후 지금의 삼광에서 너르내로 가는 길목에 큰 기와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근처의 땅을 모조리 사들여 집터로 담과 담을 쌓았는데 삼광부락 전체가 담 안에 들어갔으며 담은 꼭 2중으로 쌓았다고 한다. 이토록 넓은 박씨집에는 큰 광이 세 개 있었는데 첫째 광에는 무기, 둘째 광에는 식량, 셋째 광에는 금은보화를 쌓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필남의 집이 ‘세 광집’이라 불리기도 했다는데 박필남이 이토록 후미진 곳에 큰집을 지은 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는 역적모의에 쓰려고 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박필남은 이곳에 집을 짓기 전에 집 위쪽에다 조상의 산소부터 옮겨 놓았다고 하는데 이 자리는 전부터 풍수들이 산소를 볼 때마다 역적이 날 자리라해서 산소 쓰기를 피해왔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 후 무슨 곡절인지 알 수 없으나 하루는 조정에서 박필남을 잡으라는 영이 떨어졌다. 영을 받은 강원감영에서 군사들이 나와 찾았으나 박필남은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군졸들은 역적의 집이라고 하여 집에 불을 놓았다. 그래도 집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박필남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담을 허무니 2중으로 된 담사이의 통로에 숨어 있던 박필남을 붙들었다고 한다. 그가 붙들려간 후 집터는 다시 밭으로 변했다는데 이름만은 여전히 ‘세광댁’ 혹은 ‘세광마을’로 불리다가 누가 한문으로 음역한 것인지 삼광(三光)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삼익아파트와 마을이 있고 아직도 삼광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출처-봉산동 행정복지지원센터)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기의 천왕서 터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초기의 비마라사지라고 한다. 비마라는 명칭을 알아보니 여기도 우리의 의상대사가 등장을 하시는데 의상대사의 10대제자가 10대 사찰의 건축에 참여하는데 그 터를 해인사에 계시던 의상대사가 날려보낸 철마가 앉았다는 데에서 유래가 된 명칭이라고 한다. 물론 그 철마가 앉았다고 전해지는 절터는 이 곳은 아닌것 같다. 충북단양에 있다는 절터에 그런 명칭에 대한 유래가 전해져 온다고 하니까.